——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 혁명열사들의 선혈이 물들어 있다. [모택동 주석]
——자기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 [팽덕회 원수]
——혁명자에게도 고향은 소중한 곳이다. [한선초 상장]
지난 6월19일, 나는 대련시조선족 로인협회 권영호 회장과 전재열 부회장 및 금주조선족 로인협회 방창화 회장과 함께 전임 중국인민해방군여순해상경비구(中国人民解放军旅顺水警区) 장상현 부사령원을 만나 뵈였다. << 박선생, 반갑습네다.>>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에 이어 소탈한 웃음이였다. 처음 만난 장상현 옹의 왜소하고 마른몸매 ,검소한 옷차림에 웃음으로 가득 찬 얼굴은 내가 상상하던 오랜 전쟁의 시련을 겪은 사령원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저 예전에 동네에서 흔히 보던 조선족 할아버지셨다.
사전에 장상현 옹은 모든 취재를 일절 사절하여 많은 작가와 기자들이 번마다 헛탕을 치고 돌아갔다는 것, 지금까지 그에 대한 기사가 한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터라 나는 취재에는 기대를 걸지도 않고 그이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으로도 기뻤다. 그는 내가 어디 태생이며 어느지역에서 근무했는지 등을 묻고 나서 자신이 취재와 보도를 일절 사절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항일 전쟁과 해방전쟁 그리고 조선전쟁에서 무수한 조선족 열사들이 생명을 바쳤으며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모택동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족 혁명열사들의 선혈이 물들어 있다.” 고 말씀하였다. 조선족 혁명열사와 영웅들을 세세대대로 기리고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따라배우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열사와 영웅들에 비하면 나자신은 해변가의 조약돌 하나에 불과하다.」
장상현 옹,그는 누구인가?
장상현 옹은1930년 조선평안남도순천군에서 태여나 6살 때 부모의 손목을 잡고 머난먼 만주땅으로 건너와 길림성반석현명성향(吉林省磐石县明城乡)에 정착했다. 1945년10월, 15세의 어린나이로 조선의용군1지대에 참군하여 반석지역 전투와 사평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장춘해방전투에서 패장(排长)으로 승진하였다. 1948년, 중국인민해방군164사단에 편입. 1950년9월, 중국인민지원군 전선사령부에서 한선초(韩先楚)사령원의 경비와 번역을 담당했으며 그후 지원군총사령부의 경비대에서 팽덕회(彭德怀)총사령원을 비롯한 수장들의 경비와 번역 등 직책을 맡았다. 조선정전 후 한선초 사령원의 지시에 따라 대련해군중학교와 대련해군지휘학교(현 대련함정학원大连舰艇学院)에서 공부하고 1962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련해군지휘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장비부에서 근무했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복주군구(福州军区) 부사령원으로 임직하였으며 그후 제대전까지 여순해상경비구 부사령원으로 임직하였다.
그에게 40여년의 군생활에서 가장 잊지못할 일을 묻자 1946년 230명의 조선의용군이 반석에서 -30℃의 혹한에서 바지도 없이 적과 싸우며 많은 전사들이 하신에 동상을 입은 나날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
제대 후 장상현 옹은 1996년부터 6년동안 매년 자전거와 친구하여 여순에서 출발해 반석, 통화, 연변, 단동을 비롯한 동북의 혁명투쟁 전적지는 물론 저 멀리 정강산, 태항산, 연안 등 수많은 혁명근거지를 답사하였다. 그는 홀로 자전거를 타고 혁명 전적지를 답사한 중국의 유일한 사령원이며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것이다. 그가 이른 많은곳의 지방정부에서 사전에 배차를 지시하였지만 장상현 옹은 번번히 사양하고 끝까지 자전거를 고집하였다.그때 그는 이미 흰머리를 휫날리는 70의 고령이였다. 그는 전적지 답사에서 조선족 혁명투사들의 사적자료 수집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다.정성들여 빼곡히 기록한 그의 답사노트를 펼쳐보면서 나는 할말을 잃었다. 어떠한 힘이 그를 이렇게 할수 있게 하였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그가 우리에게 말해 준 조선족 혁명투사와 열사들의 영혼이였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 항일전쟁시기 조선족 인민들은 유격대를 조직해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는데 이 유격대들이 후에 동북항일연군의 주력군으로 되였다. 1931년 <중공만주성위원회의 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결의안>에 의하면 당시 동북의 2 000여명 당원 중 “조선족 동지가 85%에 달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지휘자인 주보중 장군은“1932년에 창설된 동만유격대와 1933년에 창립된 반석, 주하, 밀산, 탕원 유격대는 모두 조선족 동지들이 창설한 것이다. 이 부대들이 항일연군 1, 2, 3, 4, 6, 7군단으로 되였으며 제5군단에도 많은 우수한 조선족 동지들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1936년 가을, 안순복,리봉순 등8명의 항일연군 여전사들이 마지막 탄알을 일본 침략자들에게 쏜 뒤 목단강에 뛰여들어 함께 희생된 “8녀투강”(八女投江)의 사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해방전쟁 시기 동북 해방구에서 참군한 조선족 청장년은 62 924명인데 이는 당시 조선족 인구의 5%를 차지한다. 연변지역에서는 222 000명의 청장년과 19 000대의 마차로 담가대와 운수대를 꾸려 전선을 지원하였다.
오랜 혁명투쟁속에서 무수한 조선족 영웅들이 탄생했다. 예하면 중공만주성위원회 서기,중화쏘베트제2차대표대회 중앙집행위원,장정시 홍색간부퇀 참모장,홍군제15군단제75사 참모장을 역임한 양림 열사(1896-1936), 반석항일유격대의 창자이며 유명한 항일투사인 양정우 장군과 어깨 겯고 싸운 항일연군의 걸출한 지휘원 리홍광 열사(1910-1935), 중공북만성위원회 위원, 항일연군제3군단 군단장, 제3로군 참모장을 역임한 허형식 열사(1909-1942), 중공하북성위서기 겸 천진시위서기를 지낸 리철 열사(1901-1937) 등이다.그리고 중국혁명음악의 선구자 중 한분이며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와 조선인민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율성 선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웅들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신민주주의혁명시기 희생된 연변의 혁명열사는 14 740명인데 그중 조선족 열사가 97%가 넘는다. 평균 20세대에 1명의 열사가 있는 셈이다. 연변의 도시와 농촌에는 수많은 혁명열사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국의 이름난 하경지(贺敬之)시인은 연변을 시찰하고 “산마다 진달래, 촌마다 열사비”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장상현 옹의 진달래꽃 사랑은 남다르다. 해마다 봄이 오면 산천에 만발한 진달래와 그 향기를 따라 날아 맴도는 나비들을 바라보며 그는 희생된 전우들을 마음속에 그린다. 그는 말한다——진달래는 조국과 인민이며 진달래를 찾은 나비들은 열사들의 영령이라고.
치열한 조선전쟁시기 장상현은 지원군사령부에서 팽덕회 총사령원 등 많은 수장들의 교시를 받으며 성장했다. 한번은 팽덕회 총사령원께서 그에게 「쑈장(장상현)은 민족 자부심이 대단한데 이는 옳은것이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지원군 부대가 장상현의 고향인 순천 부근에 주둔했을 때 이를 알게 된 한선초 사령원은 「혁명자에게도 고향은 소중한 곳」이라고 하며 지프차에 사과 상자까지 실어 주면서 고향에 가서 친지들에게 인사하고 오라고 보냈다. 이는 장상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민족심을 키워주었다. 그는 조선족 후대들이 선배들의 업적과 정신을 따라 배워 조선족의 우수한 전통이 계승 발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선배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하고 있는가? 혹시 열사들의 영령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는지?
장상현 옹은 조선족의 현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개혁개방과 도시화 물결속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이루어진 조선족 집거지역은 조선족 인구의 격감 등 많은 변화와 진통을 겪고 있다. 전국의 대도시나 연해지역에 조성된 조선족 사회는 아직 여리며 미흡한 점이 많다. 지금이 바로 조선족 지성인들이 지혜와 힘을 모으는 것이 절실한 때이다. 무수한 혁명선열들의 희생이 없이 오늘이 있을 수 없듯이 많은 조선족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분투가 없이는 조선족의 찬란한 앞날도 꿈꿀 수 없다.
취재수첩을 접는순간 장상현 옹은 소중한 부탁을 남겼다. 사랑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라고——「무념(无念)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부끄럼 없는 한점의 구름이 되여다오.」 [박 수 남]